외국인보호 및 교정시설 방문조사기

말로만 보호, 교도소와 다를 바 없는 외국인보호소
                                                                      
                                                                                                             박선희 (사무국장)

   2007년 2월 10명의 이주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간 여수외국인보호소의 화재사건 이후 열악한 보호시설과 보호기간의 장기화 등 미등록 외국인 보호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사회적으로 요청되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주관으로 2007년 6월부터 11월까지 이주관련 단체 활동가, 변호사, 의사, 건축사 등 30여명과 함께 외국인보호 및 교정시설에 대한 방문조사에 함께 참여하였다.

   방문조사를 처음 의뢰받았을 때 센터에서 거의 6년을 활동했지만 작년의 여수화재 이전에 보호소를 직접 가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간혹 상담을 했던, 알고 지냈던 이주노동자가 강제출국을 당했다고 하면 그저 ‘어쩔 수 있나’라고 생각하며 넘겨버렸다. 2006년 통계로 18,500여명의 외국인이 강제출국을 당했다고 한다. 소위 선진국의 국민들에게는 보호소를 보내지 않고 강제출국 권고만 하고 내보내는 정부의 관행을 보면 대부분이 이주노동자일 것이고, 전체 40만 이주노동자에 수에 비추어 보면 5%에 가까운 수치이다. 서울에서 멀다는 이유로 한 번도 와 보지 않는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직무유기를 한 것인가?

   보호소는 보호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대중매체에서 본 교도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탈주를 방지할 목적으로 이중벽을 설치하고 외부와의 창문이 거의 폐쇄되어 있었고 환풍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거나 실내조명이 충분하지 않은 시설도 있었다. 또한 보호소 내에서도 의료시설, 운동장, 면회실 이용 등은 보호소의 허가를 받아야만 하고, 시설 내 비치된 도서의 선택 및 이용도 자유롭지 않았다. 정수기와 전화기가 거실 밖 복도에 설치되어 있어 외국인들이 손을 철문 밖으로 내밀어 물을 마시고 있으며, 경비 근무자에게 허락을 얻어 거실 밖으로 나가서야 전화를 이용할 수 있었다.

   조사대상 모든 보호실은 운동장을 구비하고 있지 않아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며, 운동장을 구비하고 있는 보호소도 매일 운동이 실시되고 있지 않았다. 어떤 시설에서는 여벌의 속옷반입이 허용되지 않아 보호외국인이 밤에 속옷을 빨아서 아침에 입고 있기도 하였다. 게다가 보호복도 여벌이 지급되지 않고 단 한 벌만 지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옷을 갈아입기 어려운 상태고 많은 보호실에서는 침구 세탁주기도 길어 모포 하나를 여러 사람이 쓰고 난 뒤에야 세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화성외국인보호소 조사를 거의 끝마치고 나오던 중 누군가 “누나” 하고 불러 돌아보니 2003년 겨울
정부의 강제추방 정책에 반대하여 성공회 성당에서 함께 농성을 하였던 네팔 이주노동자 인드라가 안에 있는 것이었다. 농성장에서도 항상 웃는 얼굴을 보이며 네팔 가요 ‘무수 무수(미소 미소)’를 히트시키며 한편 답답했던 마음에 즐거움을 주었던 그였다. 농성 후에도 여자 친구와 함께 센터를 방문하거나, 임금체불 건으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었는데 거기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예전의 미소는 사라지고 수더분한 차림의 인드라는 눈이 빨개져 있었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둘러 나오며 느꼈던 그 비참함, 내가 그를 그 곳에 있게 한 권력의 국민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인드라를 만나고 온 지 7개월이 지났고, 며칠 전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보고서를 받기 전까지 나는 그 기억을 다 잊고 지냈었다. 보고서를 읽으며 이제 나는 이주노동자들이 받는 억압이나 착취에 대하여 너무 무디어버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아직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40만의 인드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보호소에 물침대를 들여놓는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