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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이주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 인가?
이용일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hboell@pusan.ac.kr
I. 들어가면서
체류외국인 100만 명 시대의 도래가 이제 당면한 현실이 된 한국사회에 독일의 이주사와 이주정책이 남다른 이목을 끄는 대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은 혈통주의의 오랜 전통 속에서 외국인의 정주 내지 장기적 이주를 허용하지 않는 외국인정책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독일의 과거 외국인정책은 현재 한국의 외국인정책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의 고용허가제는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외국인고용제도를 근간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현대사와 맞물린 부분으로,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경제적으로 피폐했던 조국을 뒤로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동이민을 떠나 땀과 눈물을 흘렸던 곳이 다름 아닌 독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포럼의 주제이기도 한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독일 노동이민사는 빈곤과 실업으로 어려웠던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과 그것을 극복하고 일구어낸 우리 경제의 놀라운 성장을 이야기 할 때 등장하곤 하는 단골 레퍼토리이다. 또한 이들의 독일 이주경험은 오늘날 한국의 외국인노동자들의 참담한 노동조건과 인권상황을 비판하며 그 개선을 감성적으로, 윤리적으로 호소할 때 자주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본고 역시 이러한 두 가지 관심에서 출발하고 있다. 독일 이주사와 그 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독일 노동이민의 역사가 과연 우리의 이주현실에 어떠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해답을 찾는 과정은 독일 이주사를 고찰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II. 1945 이전의 독일 외국인고용: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
독일 이주사는 사실 여러 시대에 걸쳐 일어난 독일인들의 해외이주와 귀환, 그리고 외국인들의 독일로의 이주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에, 실로 방대하다. 잘 알려진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기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18세기 프로이센의 경제적 부흥에 영향을 미쳤던 프랑스계 칼뱅주의자들인 위그노들과 유대인들의 이민은 차치하고, 최소한 독일 민족국가가 처음 형성되고 있던 19세기로 시대를 한정한다 하더라도, 독일 이주사의 스펙트럼과 규모는 여전히 다채롭고 방대하다. 잠시 정리하자면, 19세기 6백 만 명 이상의 독일인들의 아메리카 이주,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1백 만 명 이상의 외국인노동자 고용, 1차 세계대전 중 2백 만 명의 외국인들과 전쟁포로들의 강제노동, 동유럽 유대인들의 독일이주, 나치 독재 하 7백 만 명 이상의 외국인들과 전쟁포로들의 강제노동, 2차 세계대전 후 1천 4백 만 명에 달하는 해외 혹은 점령지 독일인들의 추방과 독일정착, 1960년대 경제호황기 2백 60만 명 이상의 외국인고용, 구사회주의 국가들에 흩어져 살던 독일 해외동포들의 '귀환', 사회주의권 몰락과 내전으로 인한 동유럽 난민물결 등을 들 수 있다.
앞서 이미 언급했지만, 우리의 관심은 외국인고용의 역사, 그것도 한국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파독과 맞물려 있는 1960년대 이후의 독일 현대사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 이주사의 연속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사실 1945년 이전 독일로의 여러 이민물결들은 오늘날 독일 이민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하나가 제도적인 측면으로, 오늘날 독일의 노동허가제에 기반 한 단기적 외국인력 고용제도의 근간은 대부분 바이마르공화국 시기에 만들어졌다. 내국인 우선고용의 원칙과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 그리고 국가 주도의 외국인력모집 등이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 영향은 정신적, 의식적 영역에서 찾아야 한다. 1945년 이전의 독일 외국인고용은 외국인노동자들의 정주화와 그것에 따른 사회통합문제를 야기하지 않았다. 당시 외국인노동자들 대부분은 사회와 철저하게 격리된 채 허름한 노동자 임시숙소, 가건물, 수용소 등에서 생활하며,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는 역할이 종료 된 후에는 조용히 사라져 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전 외국인고용은 두 차례의 걸친 전쟁으로 극단적인 강제노동의 형태로 변모했고, 패전과 함께 갑작스럽게 종결되었다. 이러한 경험이 1960년대 이후 관찰되어지던 단기순환적 외국인력수급정책에 대한 믿음, 즉 노동시장의 수요에 따라 외국인력 수를 자유자재로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고, 또한 이러한 외국인력 고용이 이민문제로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민통제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자신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의 효율적인 통제의 이면에는 국가권력의 의한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침해, 더 극단적 경우 개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범죄가 자리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로 비스마르크 시대 문화전쟁의 일환으로 감행된 폴란드인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과 양차 대전 중 외국인 강제노동을 들 수 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중 7 백만 명 이상의 외국 민간인들과 전쟁포로들의 강제노동은 제3제국이 남긴 재앙을 딛고 탄생 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문제의 처리는 다른 과거청산작업과 달리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전쟁 종결 후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던 많은 동유럽인들의 소송들이 이어졌지만, 정작 강제노동자 배상문제는 1990년대 말 강제노동에 동원 된 유대계 미국인들의 집단소송을 통해 국제적 여론이 악화 될 때까지 한 번도 독일사회에서 크게 이슈화 된 적이 없었다. 외교적, 경제적 부담을 느꼈던 독일정부와 독일의 기업들이 반반씩 출자하여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Stiftung “Erinnerung, Verantwortung und Zukunft”)을 설립하면서, 배상문제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던 것이 2000년대 초였다. 물론 이것은 무척이나 늦은 과거청산이었다. 왜냐하면 이전 강제노동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미 저 세상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강제노동자 배상문제와 함께 강제노동자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독일에 뜨겁게 일어났다. 그 전까지 과거 외국인 강제노동의 역사는 독일인에게 있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였다. 자연 1955년 이탈리아와의 모집협약을 통해 시작된 독일 연방공화국의 외국인고용은 역사적 전례 없는 현대의 노동시장문제로만 여겨지곤 했다. 물론 전쟁이 종결된 후 난민(The Displaced Person)으로 명명된 강제노동자들을 그들의 고국이나 제3국으로 보내는 프로젝트가 종결된 것이 외국인고용이 재개되기 불과 2-3년 전인 1950년대 초였기에, 실제로 외국인고용에 대한 경험은 당시 많은 독일인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했다. 제 3 제국에서 외국인노동자를 지칭할 때 쓰이던 이방인노동자(Fremdarbeiter)라는 용어가 초빙노동자(Gastarbeiter)라는 새로운 용어로 완전히 대체되는 1960년대 초까지 여전히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이처럼 과거 외국인고용의 역사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였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었고, 1960년대 이후 독일 외국인고용정책 내지 이민정책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III. 역사 없는 타자, 독일연방공화국의 이민자들의 문화와 기억의 역사화
1955년 이탈리아와의 외국인력 모집협약은 독일, 정확히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외국인고용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규모 외국인고용은 1960년대 비로소 시작되었다. 독일은 1960년 스페인과 그리스, 1961년 터키, 1963년 모로코, 1964년 포르투갈, 1965년 튀니지, 1968년 유고슬라비아와 모집협약을 차례로 맺고, 이들 국가들로부터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을 모집했다. 독일 이민사에 기록되어 있는 '공식적인' 송출국가는 이들 8개 국가이고, 한국은 제 3세계 지원형식의 산업연수 프로그램을 골자로 하는 몇몇 산업분야에 한정된 특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 3년간의 직업교육 계약을 맺고 파독 광부 1진 123명이 처음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한 것이 1963년 12월 22일이었고, 이것은 한국인들의 독일 노동이민사의 '공식적인' 시작 일이 되었다.
이 산업연수 프로그램의 선례가 되었던 것은 일본 광부들로서 1958년부터 모집되기 시작했는데, 1963년 8월 일본정부의 파독중지 결정으로 이 프로그램은 중단되었다. 이들을 대신해 독일정부는 1963년 한국, 1965년 칠레와 같은 협약을 맺고, 이들 국가들로부터 광부들을 받아들였다. 인력난에 시달리던 독일의료계도 역시 3년의 계약조건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1965년)과 필리핀에서 간호보조원과 간호사를 불러 들였다. 1973년 오일쇼크로 인한 갑작스러운 세계경제침체의 여파로 만들어진 모집중지 조항 - 유럽연합 회원국을 제외한 모든 송출국가들로부터 새로운 외국인력 모집을 중지한다는 조항 - 은 오늘날까지 유효한데, 한국인들의 독일노동이민은 공식적인 모집협약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에 1973년 모집중지 조항에 저촉되지 않고 1970년대 말까지 계속될 수 있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에 입국한 한국인 노동자들의 수는 대략 만 8천명으로 추산하고 있고, 이들 중 절반이 귀환했다.
모집기간 중 그 인력송출규모가 한 해만도 수 만 명에서 수 십 만 명에 달했던 공식적인 송출국가들에 비해 한국의 송출규모는 작았고, 또한 정식 모집루트에서도 벗어나 있었기에, 현재 독일사회 내 대략 3만 명의 '한인공동체'의 단초를 놓은 재독 한국인 1세들의 노동이민은 많은 독일인들에게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역사로 남아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관심하기는 큰 이민자공동체를 형성한 다른 이민자들의 역사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다. 길게는 50년 이상 독일인들과 함께 살아온 이민자들에 대한 기억은 독일의 기억의 터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독일의 박물관들, 교과서, 기념비, 거리이름들 중 이민자들의 역사를 나타내며, 그것을 상징화한 것은 눈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때문에
이민자들에 대한 독일사회의 기억문화를 이슈화 한 노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이민센터의 역사가 얀 모테(Jan Motte)는 독일사회 내 이민자들을 역사 없는 인간(Menschen ohne Geschichte)으로 규정하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물론 현재 1천 5백 만 명 이상의 이민배경을 가진 자들에 의해 형성된 이민자공동체의 규모와 외국인고용 50년이라는 역사적 무게로 인해 이민자들과 그들의 역사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민관련 전시회의 증가이다. 독일에서의 이민에 대한 기록센터와 박물관(Dokumentationszentrum und Museum über die Migration in Deutschland, 약칭 DOMIT)이 1998년 에센 루어박물관에서 개최한 전시회 “이방의 고향. 터키이민의 역사”가 처음으로 대중적 관심을 끈 이후, 많은 이민관련 전시회들이 잇따라 열렸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터키와의 모집협약 40주년 기념으로 2001년 쾰른에서 열린 전시회 “40년 이방의 고향. 쾰른의 터키이민”과 독일 연방 문화재단이 이탈리아와의 모집협약 50주년이 되던 2005년에 기획한 “프로젝트 이민”의 일환으로 역시 쾰른에서 열린 전시회를 꼽을 수 있다.
특히 후자는 터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유고슬라비아, 모로코, 튀니지 등의 '공식' 송출국 외에도 베트남과 한국 등에서 온 노동자들 내지 이민자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큰 전시회였다. 무산되기는 했지만, 오늘 우리 포럼의 원래 계획에는 2005년 쾰른에서 전시되었던 한국인 독일노동이민사에 관련한 사진들과 영상물들의 전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거의 같은 기간 베를린의 독일역사박물관도 “이민국가 독일. 1500-2005 이민들”이라는 전시회를 열며, 대중들에게 독일에서의 이민자들의 역사를 환기시켰다.
독일사회 내 다문화적 이민배경을 가진 자들의 역사는 ‘단수의 역사’가 아니라 ‘복수의 역사들’이고, 독일 현대사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초국적 역사이기도 하다. 모집협약 기념과 같은 일회성 짙은 이벤트에서 출발하여 서서히 그 지평을 넓히고 있는 ‘이민자의 문화와 기억의 역사화’는 일국사적 관점, 주류사회의 집단적 기억, 고정관념, 이미지 등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굳어진 ‘불완전한 역사서술’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림 속 베를린 독일역사박물관의 전시물은 초빙노동자의 역사에 대한 주류사회에 의해 기획되거나 만들어진 집단적 기억과 이미지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시되고 있는 사진은 독일 고용주협회의 주관으로 1964년 9월 10일 쾰른의 도이츠역에서 열렸던 백 만 번 째 초빙노동자의 환영식 장면을 담고 있다. 사진 속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 백 만 번 째 초빙노동자로 독일 땅을 밟은 아만도 로드리게스 드 샤라는 이름의 포르투갈 목수였다. 독일 고용주협회로부터 예상치 못한 오토바이 선물과 꽃다발을 받아 다소 경직된 로드리게스 드 샤의 뒤로 보이는 환영식 청중들의 모습은 당시 외국인노동자를 경제성장의 역군으로 환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대변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각도에서 그날의 장면을 포착한 또 다른 사진은 이러한 이미지를 더욱 분명하게 하고 있다. 사진 속의 엷은 미소의 초빙노동자와 꽃다발, 오토바이, 독일 고용주협회와 다른 단체들에서 나온 하객들과 기자의 환한 웃음과 박수는 기획된 집단적 기억을 완벽하게 만들어 준다. 사진은 사회 내 존재했었던 외국인고용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보여주지 못한다. 물론 그것은 경제성장이 사회적 모토가 되고 있었던 1960년대 독일사회에서 수면 아래에 잠복 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력 부족의 최대 피해자가 될 수 있었을 경제계는 물론, 경제성장을 통해 계속적인 정권유지를 목표로 했던 정부나 경제적 풍요와 삶의 질, 노동시간 단축을 원했던 노동계 역시 외국인고용이 필요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처럼 제각기의 이해관계로부터 독일 연방공화국의 사회 안정과 민주주의 토착화의 주요한 요인으로 꼽히는 고도경제성장이 인력난 때문에 저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전반의 동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과거에도 그래했듯이, 외국인고용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때 외국인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 갈 것이라는 '순진한' 사회적 인식 역시 여기에 한 몫 했다.
때문에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독일사회의 호의적 태도는 다분히 조건부였던 것이다. 주인이 부르면 왔다가, 필요 없을 때 언제나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그들은 사회적으로 환영받는 손님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오늘 왔다가 내일 돌아가야 할 초빙노동자들 중 많은 이들이 1970년대 떠남 대신 장기적 머뭄을 결정했을 때, 이제껏 숨겨져 있던 외국인노동자들을 향한 사회적 불만과 불안이 봇물처럼 쏟아졌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위의 사진은 또한 로드리게스 샤가 여느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인들이 피하는 사회적 밑바닥의 일자리를 메우며 고된 노동과 외로움, 그리고 때때로 사회적 차별과 멸시를 당하며 쉽지 않은 타국에서의 삶을 영위했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가 독일에서 얻은 위암으로 포르투갈의 병상에서 쓸쓸하게 죽어갔음은 물론이고, 그가 독일 노동청이나 다른 관계기관으로부터 좀 더 자세한 정보만 들었더라면, 더 나은 독일 의료시스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족들의 불만을 독일인들이 알리 만무하다. 그의 실제적 삶과는 별개로 사진 속 로드리게스 드 샤와 그가 생전에 애지중지했던 오토바이는 1960년대 독일 고도성장사회 초빙노동자의 역사의 아이콘으로 독일에 돌아와 전시관을 찾는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IV. 머문 자들에 대한 독일 '이주정책'의 엇갈린 평가
독일 연방공화국의 이민문제는 초빙되어 왔던 노동자들이 초대한 사람들의 의도에 반하여 계속 머물려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머문 사람들, 즉 이민자들은 주류사회에 통합되지 못한 사회적 타자가 되었다. 최초의 독일민족국가인 독일제국 내 타자로서 사회적 차별과 배제를 뼈저리게 체험했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이 20세기 초에 정의한 타자개념은 현대 독일 이민문제의 핵심을 잘 꿰뚫어 보고 있다.
“타자는 지금까지 흔히 이야기했던 의미의 오늘 왔다가 내일 떠나는 유랑자가 아니라 오늘 왔다가 내일 머무는 자를 말한다 - 비록 더 이상 유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타자는 오고 감의 이탈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소위 잠재적인 유랑자인 것이다.”
머뭄의 문제가 독일 이민문제의 출발점이라 한다면, 우리에게 응당 외국인고용의 단기순환 원칙을 견지했던 독일사회에서 어떻게 초빙노동자의 정주가 가능했을까 라는 의문이 따라올 것이다. "무기한의 체류허가를 위한 데모"라는 표제가 붙어있는 다음의 사진은 그 머뭄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타협의 소산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것은 독일 현대 50년 이주사를 증언하는 사진들과 인터뷰로 꾸며진 "이민은 여러 얼굴들을 하고 있다"라는 책에 실린 사진으로, 소수자들 중 소수자로 살아야 했던 한국 이민자들의 역사를 증언해 주는 것이라 우리에게 귀하다. 그런데 사진 위의 짧은 설명을 읽노라면, 더욱이 파독 한국노동자로 실제 그 역사의 한 가운데 있었던 자들이라면, 사진과 설명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이 전혀 다르다는 것쯤은 쉽게 알아 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 파독 노동사에 대해 전혀 무지한 책의 편집인들이 여인이 덧입고 데모조끼에 쓰인 문구 "무기한 체류허가를 위하여"를 보며, 노동허가와 체류허가를 통한 외국인고용의 완충기능(Pufferfunktion)이 처음 증명되었던 1966/67 경제침체기 데모의 한 장면으로 오해했음이 틀림없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완충기능이란 원래 외국인력의 비교적 자유로운 해고를 통해 기업이 경기침체기의 경제적 타격을 덜 입게 된다는 경기완충효과를 의미하지만, 또 다른 의미의 완충기능, 즉 기업이 경기침체기 우선 외국인노동자를 집중적으로 해고시킴으로써 내국인노동자들과의 갈등을 무마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실제 1966/67년의 경제침체기에 독일인노동자 규모가 단지 2.5%로 정도 감소했던 것과 달리, 외국인노동자의 감소율은 무려 24.5%에 달했다. 한국인들의 파독도 이때 중단이 되었다. 그러나 이 경기침체기는 일시적이었고, 다시 활기를 찾은 외국인고용은 곧 200 만 명 선을 돌파했고, 최대 송출국도 이탈리아에서 터키로 바뀌었다. 물론 1969년 한국인 간호사들의 파독도 재개되었고, 1970년 한국인 광부들의 파독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1973년 오일쇼크와 함께 시작된 세계경제불황은 외국인력 모집중지를 가져왔다. 이때부터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1950년대 이후의 고도경세성장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유럽경제가 장기불황의 늪에 빠졌다. 곳곳에서 외국인노동자의 대규모 해고사태가 속출했다. 외국인노동자는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사회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심화되었다. 오히려 본격적인 사회문제가 모집중지 이후 시작된 것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독일정착을 결정하고, 가족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이후 외국인노동인구는 줄었지만, 거주외국인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고, 이것은 사회문제와 사회비용의 증가로 이어졌다. 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정착을 결정한 외국인노동자들은 더 이상 환영받는 손님이 아니었다.
모집중지를 면했다고는 하지만, 파독 한국인노동자들 역시 경제불황의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대량해고사태와 귀환압력이 잇따랐고, 1977년을 끝으로 한국인 광부들의 파독이 종결되었다. 역시 대량해고와 귀환압력에 시달리던 간호사들은 1977년에서 1978년까지 가톨릭 단체인 카리타스의 도움을 받아 서명운동, 공청회, 항의집회 등을 통해 머뭄의 투쟁을 전개했다. 위의 사진은 1966/67년이 아니라, 한국인 독일 이민노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억되는 1978년의 3월의 항의집회 때의 모습이다. 이들의 주장은 다른 외국인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5년 이상 종사자에게는 무기한 노동허가를, 8년 이상 종사자에게는 무기한 체류허가를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겸한 항의집회는 독일사회의 여 론을 움직였고, 독일정부는 간호사들의 귀환계획을 철회했다.
그렇지만 정주허용이 단지 투쟁의 결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외국인력모집 중지 이후 독일정부는 외국인 노동금지, 외국인거주 금지구역설정, 강제귀환과 같은 정주화와 이민사회의 도래를 막는 여러 조치들을 계획했지만, 번번이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특히 1960년 말에 대거 독일로 입국했던 터키인들의 정주화는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는데, 노동허가와 체류허가라는 이중적 통제수단을 통해 정주화의 방지와 강제적인 귀환이 이루어 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정부가 단기순환원칙을 위시한 강제귀환과 정주화 방지조치, 즉 공권력을 통한 대대적인 단속 등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독일역사상 최초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민주국가로서의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성숙한 인권의식과 사회적 책임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독일정부가 정주화를 허용하고, 독일의 이민현실, 독일이 이미 이민을 받아 들이는 소위 이민국가가 되었음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정부는 귀환지원금제도를 마련하여,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자발적인 귀환을 권고하는데 주력했다. 때문에 독일정부의 사회통합정책을 위시한 이민정책은 외국인모집정지 이후 많은 귀환노력에도 불구한 정주화와 이로 인한 사회문제의 증가에 대한 고육지책성격이 강했다. 때문에 머문 자들을 위한 소극적인 독일의 이민자 사회통합정책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비교적 쉽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일찍부터 그들 나름의 사회통합에 박차를 가했던 다른 서유럽국가들에 비하여 미온적이고, 패쇄적인 것으로 정평이 났었다. 여기에 이민 2, 3세들에 대한 이중국적 불허, “독일은 이민국이 아니다”로 대표되는 독일정부의 ‘이민국부정’, 극단적 민족주의, 인종주의, 홀로코스트가 남긴 과거의 굴레와 90년대 초 동독지역에서 시작되어 서독지역까지 전염병처럼 번졌던-그 정점에 1993년 졸링엔 터키 난민가정 방화가 자리하고 있는-극우주의 테러들, 학교와 같은 공공장소에서의 히잡착용과 이슬람 종교교육에 대한 논란, 이민자 2, 3세들의 학교폭력과 범죄 등의 크고 작은 문화적 갈등들이 더해져, 독일의 사회통합정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더욱 고착시켰다.
그런데 최근 독일의 이민자 사회통합정책이 너무 저평가되었다는 볼멘소리들이 내부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로정책’ 내지 ‘무정책’ 등으로 표현되는 공식적 사회통합정책의 부재로 대표되는 독일식모델이 지금까지 이루어낸 성과들이 일찍부터 적극적인 사회통합정책을 펼쳤던 여타 서유럽국가들에 비해 크게 떨어질 것이 없고, 어떠한 특정분야, 이를테면 이민자들의 사회경제적 권리부분에 있어서는 오히려 월등했다는 것이다.
실제 독일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외국인고용이 재개된 1955년부터 내국인과 동일한 노동조건과 사회보장조건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1972년에 만들어진 새 경영조직법(노동자대표법, Betriebsverfassungsgesetz)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노동자대표평의회(Betriebsrat)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함으로써, 독일 노동시장 또는 독일 사회생산시스템 내의 외국인 참여기회를 높여주었다. 외국인노동자들은 노조에도 가입할 수 있었는데, 1960년대 말부터 외국인노동자들의 노조가입율이 증가했다. 독일 금속노조의 외국인 노조가입률은 외국인고용 초기인 1961년 5%에 머물렀지만, 외국인모집이 정점에 다다른 1973년 28%를 지나 2002년 54%에 이르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2002년 금속노조의 외국인 조합원의 수는 26만 명으로 전체 조합원의 10%를 차지하는 높은 수치이고, 노조간부 역시 12%가 외국인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노동시장에서의 외국인 노동자의 동등한 권리 외에도 외국인의 사회통합에 대한 노력은 외국인이 밀집되었던 지자체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대 말 외국인 노동자의 정주화 내지 가족이민증가, 주거형태변화로 인한 사회적 인프라시설의 가중한 부담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이러한 부담은 고스란히 외국인이 집중되어 있었던 지방주정부와 지자체의 몫이 되었다. 가령 주택문제와 함께 외국인 밀집 지자체의 가장 큰 현안이 되었던 교육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국 주정부 문교부장관회의에서 1964년 외국인 노동자자녀의 취학의무가 도입되었고, 1971년에는 외국인 아동들의 학교통합에 대한 규칙조항이 만들어졌다. 이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외국인 아동들을 독일학급에 통합시키되, 귀환 시 고국의 언어와 문화와의 단절로 인해 발생할 수 있을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학교에서의 모국어교육이 병행되었다. 이와 함께 외국인 청년실업자들을 위한 직업준비코스로 독일어과정이 시민단체, 지자체, 연방이 연계되어 실시되었다. 또한 2000명 인구 이상의 지자체에 외국인들의 인권과 권익에 관한 결정들에 대해 발언권을 지니는 외국인자문위원회(Ausländerbeirat)가 설치되었다. 현재 450여개에 달하는 외국인직선의 외국인자문위원회는 독일에서 외국인의 대안적 정치참여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노동시장과 지자체에서 보여주었던 성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이민국이 되었음을 부정하고, 혈통주의적 전통과 단기 인력정책 중심의 이민억제를 견지했던 독일정부의 외국인정책은 많은 한계점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외국인정책에 일대변혁을 가져 오게 된 것은 1998년 16년간의 자유보수연정을 종식시키고 등장한 사회녹색연정(rot-grün Koalition)에 가서였다. 대변혁의 신호탄은 2000년 독일 국적법 개정으로, 이것을 통해 독일정부는 속인주의 전통을 포기하고 이중국적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보수진영의 반대로 만 24세 전까지만 이중국적을 허용하고, 이 후에는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조항이 추가되면서, 반쪽짜리 개혁이 되고 만다. 반쪽짜리 개혁이라는 오명을 쓰기는 이후에 만들어진 새 이민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이민 법안이 헌법재판소의 중재까지 가며 4년 만인 2004년 여름에야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통제적 성격과 테러에 대비한 안보조항들이 첨가되어 개혁적인 성격이 퇴보되기는 했지만, 2005년 시행된 새로운 이민법은 독일이 오래 전에 이민국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민문제를 통합적으로 다루려 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새로운 이민법에 따라 기존의 5가지 체류허가종류들이 유기한의 체류허가(eine befristete Aufenthaltserlaubnis)와 무기한의 정착허가(eine unbefristete Niederlassungserlaubnis)로 단순화되면서, 사실상 이민을 통한 정착이 기정사실화되었고, 여러 행정기관들에서 분리되어 다루어졌던 이민관련 업무를 통합적으로 연계, 관리하는 이민청이 신설되었다. 무엇보다 눈에 띠는 변화는 이제껏 답보상태에 빠져있던 사회통합부분에서 일어났는데, 이민법은 새로운 이민자들과 사회통합에 문제가 되는 장기체류 외국인들에게 독일의 언어, 역사, 문화강좌를 통해 독일사회에 적응을 돕는 사회통합코스 참가를 의무화시켰다.
이러한 새로운 이민법은 정권교체를 통해 다시 개정되는 운명을 맞았다. 2007년 연방의회와 하원성격의 연방평의회를 통과하여 내년에 시행 될 새로운 이민법 개정안은 더욱 안보와 국가통제의 성격이 강화된 개혁의 후퇴라는 평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독일정부가 이민국 현실을 무시하는 일방적 동화정책으로 회귀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비록 여전히 사회통합정책의 내용을 놓고 설왕설래를 벌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선도문화로의 일방적 통합이 미래 이민사회의 성공적 정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도처에서 내국인과 이민자를 만족시켜주는 상호간의 사회통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독일 정치가들과 이민자사회의 대표들이 처음으로 2006년부터 매년 베를린의 수상관저에 모여 상호소통을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좋은 예가 된다. ‘역사적 사건’으로 과장되기도 하고, ‘하나의 정치적 쇼’로 폄하되기도 했던 사회통합 대표자회의의 직접적인 계기는 뤼틀리 실업학교의 폭력사태와 2005년 프랑스 소요사태로 드러났던 이민자 2, 3세의 사회통합문제였다. 이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사회적 안정과 국가안보를 이룰 수 없다는 위기감과 실제 이주민들의 사회통합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를 했지만, 정작 그것의 또 다른 주체인 이주민들과는 사회통합에 대해 논의 한 적이 없다는 자신 반성이 한 몫 했던 것이다. 어쨌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참여배제로 인해 전체인구의 5분에 1에 육박하는 이민배경을 가진 자들의 분노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귀 기우리려는 움직임이 최근 독일 주류사회 도처에서 포착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V. 나오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독일 이주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굳이 발제문의 제목으로 달면서까지 강조한 것이 무색해질 만큼, 사실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독일 이주사가 지금껏 단지 주류사회의 집단적 기억, 이해관계, 선입견, 이미지에 의해 기획된 역사였고, 독일 이민자들의 다양한 역사들을 담아내는 새로운 역사서술은 이제 시작단계에 있다는 사실이 그 어려움을 에둘러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민정책으로 그 대상을 좁힌다고 해도, 그 어려움은 여전하다. 왜냐하면 독일 이민정책에 대한 평가가 실제 어렵고,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두 제각기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사례는 오랫동안 한국의 외국인정책의 본보기가 되었다. 특히 한국정부는 양해각서를 통한 국가주도의 외국인모집과 내국인우선의 원칙을 골자로 하는 독일 단기 외국인력수급제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독일의 외국인정책 내지 이민정책을 맹목적으로 배워야 할 '성공한 정책'으로 보지는 않는 것이 분명하다. 독일은 '효율적인' 단기 외국인력제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외국인노동자의 정주화를 막지 못해 많은 사회적 문제에 직면했다는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정부는 사업장변경금지, 가족동반금지, 취업기간 최고 3년 설정, 그리고 불법체류자에 대한 지속적이고 강력한 단속, 처벌, 추방을 통해 단기 노동이민에서 장기체류 내지 장기이주로의 발전을 막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물론 국익이 전제가 된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국가적 통제와 관리는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를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성숙한 민주시민사회에서는 사실상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을 독일사례는 잘 말해준다.
독일이 외국인노동자의 단기순환원칙과 강제귀환을 포기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귀환을 권고하되, 그들이 머물고자 할 때는 그것을 허용할 수 있었던 이유로서 앞서도 강조했던 독일 사회의 인권의식과 사회적 책임은 짧지 않은 독일 외국인고용사로부터의 배움의 결과물이다. 130년 외국인고용의 역사는 국가권력이 민족주의와 국익의 이름으로 어떻게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과 일상을 유린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왕 인권의 문제가 나왔으니, 외국인노동자의 대한 유명한 막스 프리쉬의 문구를 인용해 보자. 솔직히 독일의 외국인정책을 이야기 할 때, 독일은 물론 한국에서도 너무 자주 인용된 터라 진부해 보이는 느낌이 없지 않으나, 독일 이주사로부터의 교훈을 찾기 위한 실마리를 주는 인용구로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노동력을 불렀다. 그런데 정작 온 것은 사람들이었다(Man hat Arbeitskräfte gerufen, und es kamen Menschen).”
독일보다 10년 앞서 외국인노동자들의 유입을 통한 사회문제를 경험했던 스위스의 막스 프리쉬의 비판의식은 전통적 이민국이 아닌 국가들에서 시행되었거나, 여전히 시행되고 있는 단기 인력수급정책의 문제점을 잘 꿰뚫어 보고 있다. 사실 오늘 필요하면 불렀다, 내일 필요 없으면 보낼 수 있는 인력을 원했던 독일사회는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강제로 내몰 수 없었다. 그렇게 내키지 않는 동거를 시작한 독일사회는 많은 제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대는 실패했고, 그것으로 인한 감정의 골은 무척이나 깊다. 독일에서 이민의 문제는 어느 듯 치유하기 어려운 감정의 문제로 발전했는데, 이민의 출발점이 사람들의 문제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노동력부족을 메우고 이윤극대화를 꾀하기 위해 혹은 구조개혁의 위기 속 기업의 생존을 위해 외국인력이 필요했던 기업주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통한 임금상승과 사회복지효과, 특히 삶의 질과 관계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외국인력의 도입을 용인했던 노동자들, 그리고 정권유지를 위해 경제성장을 지탱하는 노동시장정책의 일환으로 외국인력을 원했던 정치가들의 이해관계와 더 나은 임금, 더 나은 일자리, 가족들의 생계유지, 더 나은 자녀교육기회,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과 행복 등의 다양한 이유로 노동이민을 선택한 많은 외국인노동자들 내지 이민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 질 때 이민 내지 노동이민이 시작된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이민 내지 노동이민은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곧 이해관계들의 갈등과 충돌을 초래한다. 이미 국가적 통제와 관리의 한도를 넘어버린 실타래와 같이 얽혀있는 사람들과 사람들의 갈등과 충돌의 해결은 요원해진다.
결국 우리는 독일의 사례에서 한번 시작된 노동이민은 국가의 효율적인 통제와 관리를 불가능하게 만들 만큼 복잡한 이민문제를 야기하고, 이 문제의 치유를 위한 특효약은 사실상 없다는 겸허한 사실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손을 놓고 있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차피 이민문제가 사람들의 욕망들과 그것들의 충돌에서 시작된 불치의 만성병으로 진단이 났다면, 그것이 치명적인 병으로 발전하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간구해야 한다. 단지 요구되는 것은 사고의 전환으로, 사람들과 사람들의 갈등과 충돌로 시작된 문제이니, 그 출발점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는 일방적인 통제와 관리가 아니라, 주류사회의 토착민들과 이주민들의 소통을 위한 사회적, 문화적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이민문제는 양자 간의 소통과 대화, 그리고 그것을 기반 한 정책을 통해 순하게 길들여져야 할 것이다.
물론 이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된, 혹은 그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한 이주정책은 독일에 있어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솔직히 그러한 대화는 이제 시작되었고, 독일정부가 만든 이러한 소통창구에 대한 진위마저 아직은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것이 독일 인구의 5분1에 육박하는 이민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다양한 형태의 저항과 분노의 표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후 50년이 넘은 노동이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주류사회와 맞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할 수 있는 이민자공동체들은 독일에서도 흔한 예가 아니다.
그럼에도 독일의 예가 우리에게 부러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 이주노동자들과 이민자들 처한 현재의 상황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열악하다는 사실의 방증이리라. 귄터 발라프가 19세기에 대한 역사책에서나 서술됨 직한 상황이라고 혹평했던 1980년대 독일 외국인노동자들의 상황, 아니면 사진에 나오는 1970년대 우리 간호사들의 상황과 비교해도, 그 부러움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 동일한 노동을 할 경우, 독일인들과 대등한 임금을 받았고, 노조에 가입할 수 있었고, 많은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누렸고, 필요한 경우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독일사례가 남다르지 않은 것은 우리의 현대사적 경험 때문이다. 역지사지의 원리나 반인종주의 캠페인의 모토로 자주 사용되는 “누구나 외국인이다”라는 말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자신이 태어나거나 국적을 가지고 있는 나라를 떠나면, 누구나 외국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한다면, 외국인과 더불어 사는 다문화사회라는 것은 단지 이상 속에만 존재하는 헛구호만은 되지 않으리라. 그런데 정작 유학이나 해외이민의 경험을 통해 짧지 않은 외국생활을 통해 외국인으로서의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고 돌아 온 자들로 넘쳐 나는 사회임에도 정작 이곳의 외국인들과 외국인정책개선은 여전히 사회적 관심 밖에 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이곳의 외국인노동자들과 동일시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한때 외국인노동자였다”라는 말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줄 독일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것은 어떨까? 독일 현대사이자 한국 현대사의 일부이면서도 양쪽 모두에게 잊혀진 역사를 기억하는 것의 출발점은 어쩌면 이 땅에서 타자로서 살아가는 자들의 질고를 이해하고, 그들의 소리에 기울이며, 그들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닐지? 이 제안이 너무 이상적이고, 감정적으로 들린다면, 이민문제가 어차피 우리, 즉 토착민과 이주민의 감정을 관통하는 문제임을 상기시키리라. 굳이 이성적 측면, 즉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한다고 해도, 이민환경을 개선하여 고급 기술인력은 적극 유치하고, 미숙련인력은 필요한 경우 받아들이되, 정주화는 막는다는 선별이민의 원칙 -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발견되어지는 원칙 - 이 국익이 아니라, 어떠한 이유로든 이 땅에 머물고자 하는 이민배경을 가진 자들과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이후 있을 엄청난 비용의 사회통합비용과 사회적 불안과 소요라는 치명적 결과를 막는 진정한 의미의 국익임이 틀림없다.
(이 자료는 2007년 11월 6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개최한 협의회에서 발표한 자료임).
이용일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hboell@pusan.ac.kr
I. 들어가면서
체류외국인 100만 명 시대의 도래가 이제 당면한 현실이 된 한국사회에 독일의 이주사와 이주정책이 남다른 이목을 끄는 대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은 혈통주의의 오랜 전통 속에서 외국인의 정주 내지 장기적 이주를 허용하지 않는 외국인정책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독일의 과거 외국인정책은 현재 한국의 외국인정책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의 고용허가제는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외국인고용제도를 근간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현대사와 맞물린 부분으로,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경제적으로 피폐했던 조국을 뒤로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동이민을 떠나 땀과 눈물을 흘렸던 곳이 다름 아닌 독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포럼의 주제이기도 한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독일 노동이민사는 빈곤과 실업으로 어려웠던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과 그것을 극복하고 일구어낸 우리 경제의 놀라운 성장을 이야기 할 때 등장하곤 하는 단골 레퍼토리이다. 또한 이들의 독일 이주경험은 오늘날 한국의 외국인노동자들의 참담한 노동조건과 인권상황을 비판하며 그 개선을 감성적으로, 윤리적으로 호소할 때 자주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본고 역시 이러한 두 가지 관심에서 출발하고 있다. 독일 이주사와 그 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독일 노동이민의 역사가 과연 우리의 이주현실에 어떠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해답을 찾는 과정은 독일 이주사를 고찰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II. 1945 이전의 독일 외국인고용: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
독일 이주사는 사실 여러 시대에 걸쳐 일어난 독일인들의 해외이주와 귀환, 그리고 외국인들의 독일로의 이주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에, 실로 방대하다. 잘 알려진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기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18세기 프로이센의 경제적 부흥에 영향을 미쳤던 프랑스계 칼뱅주의자들인 위그노들과 유대인들의 이민은 차치하고, 최소한 독일 민족국가가 처음 형성되고 있던 19세기로 시대를 한정한다 하더라도, 독일 이주사의 스펙트럼과 규모는 여전히 다채롭고 방대하다. 잠시 정리하자면, 19세기 6백 만 명 이상의 독일인들의 아메리카 이주,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1백 만 명 이상의 외국인노동자 고용, 1차 세계대전 중 2백 만 명의 외국인들과 전쟁포로들의 강제노동, 동유럽 유대인들의 독일이주, 나치 독재 하 7백 만 명 이상의 외국인들과 전쟁포로들의 강제노동, 2차 세계대전 후 1천 4백 만 명에 달하는 해외 혹은 점령지 독일인들의 추방과 독일정착, 1960년대 경제호황기 2백 60만 명 이상의 외국인고용, 구사회주의 국가들에 흩어져 살던 독일 해외동포들의 '귀환', 사회주의권 몰락과 내전으로 인한 동유럽 난민물결 등을 들 수 있다.
앞서 이미 언급했지만, 우리의 관심은 외국인고용의 역사, 그것도 한국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파독과 맞물려 있는 1960년대 이후의 독일 현대사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 이주사의 연속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사실 1945년 이전 독일로의 여러 이민물결들은 오늘날 독일 이민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하나가 제도적인 측면으로, 오늘날 독일의 노동허가제에 기반 한 단기적 외국인력 고용제도의 근간은 대부분 바이마르공화국 시기에 만들어졌다. 내국인 우선고용의 원칙과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 그리고 국가 주도의 외국인력모집 등이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 영향은 정신적, 의식적 영역에서 찾아야 한다. 1945년 이전의 독일 외국인고용은 외국인노동자들의 정주화와 그것에 따른 사회통합문제를 야기하지 않았다. 당시 외국인노동자들 대부분은 사회와 철저하게 격리된 채 허름한 노동자 임시숙소, 가건물, 수용소 등에서 생활하며,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는 역할이 종료 된 후에는 조용히 사라져 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전 외국인고용은 두 차례의 걸친 전쟁으로 극단적인 강제노동의 형태로 변모했고, 패전과 함께 갑작스럽게 종결되었다. 이러한 경험이 1960년대 이후 관찰되어지던 단기순환적 외국인력수급정책에 대한 믿음, 즉 노동시장의 수요에 따라 외국인력 수를 자유자재로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고, 또한 이러한 외국인력 고용이 이민문제로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민통제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자신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의 효율적인 통제의 이면에는 국가권력의 의한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침해, 더 극단적 경우 개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범죄가 자리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로 비스마르크 시대 문화전쟁의 일환으로 감행된 폴란드인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과 양차 대전 중 외국인 강제노동을 들 수 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중 7 백만 명 이상의 외국 민간인들과 전쟁포로들의 강제노동은 제3제국이 남긴 재앙을 딛고 탄생 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문제의 처리는 다른 과거청산작업과 달리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전쟁 종결 후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던 많은 동유럽인들의 소송들이 이어졌지만, 정작 강제노동자 배상문제는 1990년대 말 강제노동에 동원 된 유대계 미국인들의 집단소송을 통해 국제적 여론이 악화 될 때까지 한 번도 독일사회에서 크게 이슈화 된 적이 없었다. 외교적, 경제적 부담을 느꼈던 독일정부와 독일의 기업들이 반반씩 출자하여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Stiftung “Erinnerung, Verantwortung und Zukunft”)을 설립하면서, 배상문제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던 것이 2000년대 초였다. 물론 이것은 무척이나 늦은 과거청산이었다. 왜냐하면 이전 강제노동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미 저 세상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강제노동자 배상문제와 함께 강제노동자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독일에 뜨겁게 일어났다. 그 전까지 과거 외국인 강제노동의 역사는 독일인에게 있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였다. 자연 1955년 이탈리아와의 모집협약을 통해 시작된 독일 연방공화국의 외국인고용은 역사적 전례 없는 현대의 노동시장문제로만 여겨지곤 했다. 물론 전쟁이 종결된 후 난민(The Displaced Person)으로 명명된 강제노동자들을 그들의 고국이나 제3국으로 보내는 프로젝트가 종결된 것이 외국인고용이 재개되기 불과 2-3년 전인 1950년대 초였기에, 실제로 외국인고용에 대한 경험은 당시 많은 독일인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했다. 제 3 제국에서 외국인노동자를 지칭할 때 쓰이던 이방인노동자(Fremdarbeiter)라는 용어가 초빙노동자(Gastarbeiter)라는 새로운 용어로 완전히 대체되는 1960년대 초까지 여전히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이처럼 과거 외국인고용의 역사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였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었고, 1960년대 이후 독일 외국인고용정책 내지 이민정책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III. 역사 없는 타자, 독일연방공화국의 이민자들의 문화와 기억의 역사화
1955년 이탈리아와의 외국인력 모집협약은 독일, 정확히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외국인고용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규모 외국인고용은 1960년대 비로소 시작되었다. 독일은 1960년 스페인과 그리스, 1961년 터키, 1963년 모로코, 1964년 포르투갈, 1965년 튀니지, 1968년 유고슬라비아와 모집협약을 차례로 맺고, 이들 국가들로부터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을 모집했다. 독일 이민사에 기록되어 있는 '공식적인' 송출국가는 이들 8개 국가이고, 한국은 제 3세계 지원형식의 산업연수 프로그램을 골자로 하는 몇몇 산업분야에 한정된 특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 3년간의 직업교육 계약을 맺고 파독 광부 1진 123명이 처음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한 것이 1963년 12월 22일이었고, 이것은 한국인들의 독일 노동이민사의 '공식적인' 시작 일이 되었다.
이 산업연수 프로그램의 선례가 되었던 것은 일본 광부들로서 1958년부터 모집되기 시작했는데, 1963년 8월 일본정부의 파독중지 결정으로 이 프로그램은 중단되었다. 이들을 대신해 독일정부는 1963년 한국, 1965년 칠레와 같은 협약을 맺고, 이들 국가들로부터 광부들을 받아들였다. 인력난에 시달리던 독일의료계도 역시 3년의 계약조건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1965년)과 필리핀에서 간호보조원과 간호사를 불러 들였다. 1973년 오일쇼크로 인한 갑작스러운 세계경제침체의 여파로 만들어진 모집중지 조항 - 유럽연합 회원국을 제외한 모든 송출국가들로부터 새로운 외국인력 모집을 중지한다는 조항 - 은 오늘날까지 유효한데, 한국인들의 독일노동이민은 공식적인 모집협약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에 1973년 모집중지 조항에 저촉되지 않고 1970년대 말까지 계속될 수 있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에 입국한 한국인 노동자들의 수는 대략 만 8천명으로 추산하고 있고, 이들 중 절반이 귀환했다.
모집기간 중 그 인력송출규모가 한 해만도 수 만 명에서 수 십 만 명에 달했던 공식적인 송출국가들에 비해 한국의 송출규모는 작았고, 또한 정식 모집루트에서도 벗어나 있었기에, 현재 독일사회 내 대략 3만 명의 '한인공동체'의 단초를 놓은 재독 한국인 1세들의 노동이민은 많은 독일인들에게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역사로 남아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관심하기는 큰 이민자공동체를 형성한 다른 이민자들의 역사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다. 길게는 50년 이상 독일인들과 함께 살아온 이민자들에 대한 기억은 독일의 기억의 터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독일의 박물관들, 교과서, 기념비, 거리이름들 중 이민자들의 역사를 나타내며, 그것을 상징화한 것은 눈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때문에
이민자들에 대한 독일사회의 기억문화를 이슈화 한 노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이민센터의 역사가 얀 모테(Jan Motte)는 독일사회 내 이민자들을 역사 없는 인간(Menschen ohne Geschichte)으로 규정하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물론 현재 1천 5백 만 명 이상의 이민배경을 가진 자들에 의해 형성된 이민자공동체의 규모와 외국인고용 50년이라는 역사적 무게로 인해 이민자들과 그들의 역사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민관련 전시회의 증가이다. 독일에서의 이민에 대한 기록센터와 박물관(Dokumentationszentrum und Museum über die Migration in Deutschland, 약칭 DOMIT)이 1998년 에센 루어박물관에서 개최한 전시회 “이방의 고향. 터키이민의 역사”가 처음으로 대중적 관심을 끈 이후, 많은 이민관련 전시회들이 잇따라 열렸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터키와의 모집협약 40주년 기념으로 2001년 쾰른에서 열린 전시회 “40년 이방의 고향. 쾰른의 터키이민”과 독일 연방 문화재단이 이탈리아와의 모집협약 50주년이 되던 2005년에 기획한 “프로젝트 이민”의 일환으로 역시 쾰른에서 열린 전시회를 꼽을 수 있다.
특히 후자는 터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유고슬라비아, 모로코, 튀니지 등의 '공식' 송출국 외에도 베트남과 한국 등에서 온 노동자들 내지 이민자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큰 전시회였다. 무산되기는 했지만, 오늘 우리 포럼의 원래 계획에는 2005년 쾰른에서 전시되었던 한국인 독일노동이민사에 관련한 사진들과 영상물들의 전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거의 같은 기간 베를린의 독일역사박물관도 “이민국가 독일. 1500-2005 이민들”이라는 전시회를 열며, 대중들에게 독일에서의 이민자들의 역사를 환기시켰다.
독일사회 내 다문화적 이민배경을 가진 자들의 역사는 ‘단수의 역사’가 아니라 ‘복수의 역사들’이고, 독일 현대사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초국적 역사이기도 하다. 모집협약 기념과 같은 일회성 짙은 이벤트에서 출발하여 서서히 그 지평을 넓히고 있는 ‘이민자의 문화와 기억의 역사화’는 일국사적 관점, 주류사회의 집단적 기억, 고정관념, 이미지 등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굳어진 ‘불완전한 역사서술’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림 속 베를린 독일역사박물관의 전시물은 초빙노동자의 역사에 대한 주류사회에 의해 기획되거나 만들어진 집단적 기억과 이미지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시되고 있는 사진은 독일 고용주협회의 주관으로 1964년 9월 10일 쾰른의 도이츠역에서 열렸던 백 만 번 째 초빙노동자의 환영식 장면을 담고 있다. 사진 속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 백 만 번 째 초빙노동자로 독일 땅을 밟은 아만도 로드리게스 드 샤라는 이름의 포르투갈 목수였다. 독일 고용주협회로부터 예상치 못한 오토바이 선물과 꽃다발을 받아 다소 경직된 로드리게스 드 샤의 뒤로 보이는 환영식 청중들의 모습은 당시 외국인노동자를 경제성장의 역군으로 환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대변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각도에서 그날의 장면을 포착한 또 다른 사진은 이러한 이미지를 더욱 분명하게 하고 있다. 사진 속의 엷은 미소의 초빙노동자와 꽃다발, 오토바이, 독일 고용주협회와 다른 단체들에서 나온 하객들과 기자의 환한 웃음과 박수는 기획된 집단적 기억을 완벽하게 만들어 준다. 사진은 사회 내 존재했었던 외국인고용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보여주지 못한다. 물론 그것은 경제성장이 사회적 모토가 되고 있었던 1960년대 독일사회에서 수면 아래에 잠복 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력 부족의 최대 피해자가 될 수 있었을 경제계는 물론, 경제성장을 통해 계속적인 정권유지를 목표로 했던 정부나 경제적 풍요와 삶의 질, 노동시간 단축을 원했던 노동계 역시 외국인고용이 필요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처럼 제각기의 이해관계로부터 독일 연방공화국의 사회 안정과 민주주의 토착화의 주요한 요인으로 꼽히는 고도경제성장이 인력난 때문에 저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전반의 동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과거에도 그래했듯이, 외국인고용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때 외국인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 갈 것이라는 '순진한' 사회적 인식 역시 여기에 한 몫 했다.
때문에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독일사회의 호의적 태도는 다분히 조건부였던 것이다. 주인이 부르면 왔다가, 필요 없을 때 언제나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그들은 사회적으로 환영받는 손님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오늘 왔다가 내일 돌아가야 할 초빙노동자들 중 많은 이들이 1970년대 떠남 대신 장기적 머뭄을 결정했을 때, 이제껏 숨겨져 있던 외국인노동자들을 향한 사회적 불만과 불안이 봇물처럼 쏟아졌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위의 사진은 또한 로드리게스 샤가 여느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인들이 피하는 사회적 밑바닥의 일자리를 메우며 고된 노동과 외로움, 그리고 때때로 사회적 차별과 멸시를 당하며 쉽지 않은 타국에서의 삶을 영위했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가 독일에서 얻은 위암으로 포르투갈의 병상에서 쓸쓸하게 죽어갔음은 물론이고, 그가 독일 노동청이나 다른 관계기관으로부터 좀 더 자세한 정보만 들었더라면, 더 나은 독일 의료시스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족들의 불만을 독일인들이 알리 만무하다. 그의 실제적 삶과는 별개로 사진 속 로드리게스 드 샤와 그가 생전에 애지중지했던 오토바이는 1960년대 독일 고도성장사회 초빙노동자의 역사의 아이콘으로 독일에 돌아와 전시관을 찾는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IV. 머문 자들에 대한 독일 '이주정책'의 엇갈린 평가
독일 연방공화국의 이민문제는 초빙되어 왔던 노동자들이 초대한 사람들의 의도에 반하여 계속 머물려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머문 사람들, 즉 이민자들은 주류사회에 통합되지 못한 사회적 타자가 되었다. 최초의 독일민족국가인 독일제국 내 타자로서 사회적 차별과 배제를 뼈저리게 체험했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이 20세기 초에 정의한 타자개념은 현대 독일 이민문제의 핵심을 잘 꿰뚫어 보고 있다.
“타자는 지금까지 흔히 이야기했던 의미의 오늘 왔다가 내일 떠나는 유랑자가 아니라 오늘 왔다가 내일 머무는 자를 말한다 - 비록 더 이상 유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타자는 오고 감의 이탈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소위 잠재적인 유랑자인 것이다.”
머뭄의 문제가 독일 이민문제의 출발점이라 한다면, 우리에게 응당 외국인고용의 단기순환 원칙을 견지했던 독일사회에서 어떻게 초빙노동자의 정주가 가능했을까 라는 의문이 따라올 것이다. "무기한의 체류허가를 위한 데모"라는 표제가 붙어있는 다음의 사진은 그 머뭄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타협의 소산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것은 독일 현대 50년 이주사를 증언하는 사진들과 인터뷰로 꾸며진 "이민은 여러 얼굴들을 하고 있다"라는 책에 실린 사진으로, 소수자들 중 소수자로 살아야 했던 한국 이민자들의 역사를 증언해 주는 것이라 우리에게 귀하다. 그런데 사진 위의 짧은 설명을 읽노라면, 더욱이 파독 한국노동자로 실제 그 역사의 한 가운데 있었던 자들이라면, 사진과 설명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이 전혀 다르다는 것쯤은 쉽게 알아 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 파독 노동사에 대해 전혀 무지한 책의 편집인들이 여인이 덧입고 데모조끼에 쓰인 문구 "무기한 체류허가를 위하여"를 보며, 노동허가와 체류허가를 통한 외국인고용의 완충기능(Pufferfunktion)이 처음 증명되었던 1966/67 경제침체기 데모의 한 장면으로 오해했음이 틀림없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완충기능이란 원래 외국인력의 비교적 자유로운 해고를 통해 기업이 경기침체기의 경제적 타격을 덜 입게 된다는 경기완충효과를 의미하지만, 또 다른 의미의 완충기능, 즉 기업이 경기침체기 우선 외국인노동자를 집중적으로 해고시킴으로써 내국인노동자들과의 갈등을 무마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실제 1966/67년의 경제침체기에 독일인노동자 규모가 단지 2.5%로 정도 감소했던 것과 달리, 외국인노동자의 감소율은 무려 24.5%에 달했다. 한국인들의 파독도 이때 중단이 되었다. 그러나 이 경기침체기는 일시적이었고, 다시 활기를 찾은 외국인고용은 곧 200 만 명 선을 돌파했고, 최대 송출국도 이탈리아에서 터키로 바뀌었다. 물론 1969년 한국인 간호사들의 파독도 재개되었고, 1970년 한국인 광부들의 파독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1973년 오일쇼크와 함께 시작된 세계경제불황은 외국인력 모집중지를 가져왔다. 이때부터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1950년대 이후의 고도경세성장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유럽경제가 장기불황의 늪에 빠졌다. 곳곳에서 외국인노동자의 대규모 해고사태가 속출했다. 외국인노동자는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사회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심화되었다. 오히려 본격적인 사회문제가 모집중지 이후 시작된 것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독일정착을 결정하고, 가족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이후 외국인노동인구는 줄었지만, 거주외국인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고, 이것은 사회문제와 사회비용의 증가로 이어졌다. 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정착을 결정한 외국인노동자들은 더 이상 환영받는 손님이 아니었다.
모집중지를 면했다고는 하지만, 파독 한국인노동자들 역시 경제불황의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대량해고사태와 귀환압력이 잇따랐고, 1977년을 끝으로 한국인 광부들의 파독이 종결되었다. 역시 대량해고와 귀환압력에 시달리던 간호사들은 1977년에서 1978년까지 가톨릭 단체인 카리타스의 도움을 받아 서명운동, 공청회, 항의집회 등을 통해 머뭄의 투쟁을 전개했다. 위의 사진은 1966/67년이 아니라, 한국인 독일 이민노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억되는 1978년의 3월의 항의집회 때의 모습이다. 이들의 주장은 다른 외국인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5년 이상 종사자에게는 무기한 노동허가를, 8년 이상 종사자에게는 무기한 체류허가를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겸한 항의집회는 독일사회의 여 론을 움직였고, 독일정부는 간호사들의 귀환계획을 철회했다.
그렇지만 정주허용이 단지 투쟁의 결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외국인력모집 중지 이후 독일정부는 외국인 노동금지, 외국인거주 금지구역설정, 강제귀환과 같은 정주화와 이민사회의 도래를 막는 여러 조치들을 계획했지만, 번번이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특히 1960년 말에 대거 독일로 입국했던 터키인들의 정주화는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는데, 노동허가와 체류허가라는 이중적 통제수단을 통해 정주화의 방지와 강제적인 귀환이 이루어 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정부가 단기순환원칙을 위시한 강제귀환과 정주화 방지조치, 즉 공권력을 통한 대대적인 단속 등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독일역사상 최초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민주국가로서의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성숙한 인권의식과 사회적 책임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독일정부가 정주화를 허용하고, 독일의 이민현실, 독일이 이미 이민을 받아 들이는 소위 이민국가가 되었음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정부는 귀환지원금제도를 마련하여,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자발적인 귀환을 권고하는데 주력했다. 때문에 독일정부의 사회통합정책을 위시한 이민정책은 외국인모집정지 이후 많은 귀환노력에도 불구한 정주화와 이로 인한 사회문제의 증가에 대한 고육지책성격이 강했다. 때문에 머문 자들을 위한 소극적인 독일의 이민자 사회통합정책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비교적 쉽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일찍부터 그들 나름의 사회통합에 박차를 가했던 다른 서유럽국가들에 비하여 미온적이고, 패쇄적인 것으로 정평이 났었다. 여기에 이민 2, 3세들에 대한 이중국적 불허, “독일은 이민국이 아니다”로 대표되는 독일정부의 ‘이민국부정’, 극단적 민족주의, 인종주의, 홀로코스트가 남긴 과거의 굴레와 90년대 초 동독지역에서 시작되어 서독지역까지 전염병처럼 번졌던-그 정점에 1993년 졸링엔 터키 난민가정 방화가 자리하고 있는-극우주의 테러들, 학교와 같은 공공장소에서의 히잡착용과 이슬람 종교교육에 대한 논란, 이민자 2, 3세들의 학교폭력과 범죄 등의 크고 작은 문화적 갈등들이 더해져, 독일의 사회통합정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더욱 고착시켰다.
그런데 최근 독일의 이민자 사회통합정책이 너무 저평가되었다는 볼멘소리들이 내부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로정책’ 내지 ‘무정책’ 등으로 표현되는 공식적 사회통합정책의 부재로 대표되는 독일식모델이 지금까지 이루어낸 성과들이 일찍부터 적극적인 사회통합정책을 펼쳤던 여타 서유럽국가들에 비해 크게 떨어질 것이 없고, 어떠한 특정분야, 이를테면 이민자들의 사회경제적 권리부분에 있어서는 오히려 월등했다는 것이다.
실제 독일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외국인고용이 재개된 1955년부터 내국인과 동일한 노동조건과 사회보장조건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1972년에 만들어진 새 경영조직법(노동자대표법, Betriebsverfassungsgesetz)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노동자대표평의회(Betriebsrat)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함으로써, 독일 노동시장 또는 독일 사회생산시스템 내의 외국인 참여기회를 높여주었다. 외국인노동자들은 노조에도 가입할 수 있었는데, 1960년대 말부터 외국인노동자들의 노조가입율이 증가했다. 독일 금속노조의 외국인 노조가입률은 외국인고용 초기인 1961년 5%에 머물렀지만, 외국인모집이 정점에 다다른 1973년 28%를 지나 2002년 54%에 이르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2002년 금속노조의 외국인 조합원의 수는 26만 명으로 전체 조합원의 10%를 차지하는 높은 수치이고, 노조간부 역시 12%가 외국인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노동시장에서의 외국인 노동자의 동등한 권리 외에도 외국인의 사회통합에 대한 노력은 외국인이 밀집되었던 지자체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대 말 외국인 노동자의 정주화 내지 가족이민증가, 주거형태변화로 인한 사회적 인프라시설의 가중한 부담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이러한 부담은 고스란히 외국인이 집중되어 있었던 지방주정부와 지자체의 몫이 되었다. 가령 주택문제와 함께 외국인 밀집 지자체의 가장 큰 현안이 되었던 교육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국 주정부 문교부장관회의에서 1964년 외국인 노동자자녀의 취학의무가 도입되었고, 1971년에는 외국인 아동들의 학교통합에 대한 규칙조항이 만들어졌다. 이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외국인 아동들을 독일학급에 통합시키되, 귀환 시 고국의 언어와 문화와의 단절로 인해 발생할 수 있을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학교에서의 모국어교육이 병행되었다. 이와 함께 외국인 청년실업자들을 위한 직업준비코스로 독일어과정이 시민단체, 지자체, 연방이 연계되어 실시되었다. 또한 2000명 인구 이상의 지자체에 외국인들의 인권과 권익에 관한 결정들에 대해 발언권을 지니는 외국인자문위원회(Ausländerbeirat)가 설치되었다. 현재 450여개에 달하는 외국인직선의 외국인자문위원회는 독일에서 외국인의 대안적 정치참여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노동시장과 지자체에서 보여주었던 성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이민국이 되었음을 부정하고, 혈통주의적 전통과 단기 인력정책 중심의 이민억제를 견지했던 독일정부의 외국인정책은 많은 한계점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외국인정책에 일대변혁을 가져 오게 된 것은 1998년 16년간의 자유보수연정을 종식시키고 등장한 사회녹색연정(rot-grün Koalition)에 가서였다. 대변혁의 신호탄은 2000년 독일 국적법 개정으로, 이것을 통해 독일정부는 속인주의 전통을 포기하고 이중국적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보수진영의 반대로 만 24세 전까지만 이중국적을 허용하고, 이 후에는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조항이 추가되면서, 반쪽짜리 개혁이 되고 만다. 반쪽짜리 개혁이라는 오명을 쓰기는 이후에 만들어진 새 이민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이민 법안이 헌법재판소의 중재까지 가며 4년 만인 2004년 여름에야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통제적 성격과 테러에 대비한 안보조항들이 첨가되어 개혁적인 성격이 퇴보되기는 했지만, 2005년 시행된 새로운 이민법은 독일이 오래 전에 이민국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민문제를 통합적으로 다루려 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새로운 이민법에 따라 기존의 5가지 체류허가종류들이 유기한의 체류허가(eine befristete Aufenthaltserlaubnis)와 무기한의 정착허가(eine unbefristete Niederlassungserlaubnis)로 단순화되면서, 사실상 이민을 통한 정착이 기정사실화되었고, 여러 행정기관들에서 분리되어 다루어졌던 이민관련 업무를 통합적으로 연계, 관리하는 이민청이 신설되었다. 무엇보다 눈에 띠는 변화는 이제껏 답보상태에 빠져있던 사회통합부분에서 일어났는데, 이민법은 새로운 이민자들과 사회통합에 문제가 되는 장기체류 외국인들에게 독일의 언어, 역사, 문화강좌를 통해 독일사회에 적응을 돕는 사회통합코스 참가를 의무화시켰다.
이러한 새로운 이민법은 정권교체를 통해 다시 개정되는 운명을 맞았다. 2007년 연방의회와 하원성격의 연방평의회를 통과하여 내년에 시행 될 새로운 이민법 개정안은 더욱 안보와 국가통제의 성격이 강화된 개혁의 후퇴라는 평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독일정부가 이민국 현실을 무시하는 일방적 동화정책으로 회귀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비록 여전히 사회통합정책의 내용을 놓고 설왕설래를 벌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선도문화로의 일방적 통합이 미래 이민사회의 성공적 정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도처에서 내국인과 이민자를 만족시켜주는 상호간의 사회통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독일 정치가들과 이민자사회의 대표들이 처음으로 2006년부터 매년 베를린의 수상관저에 모여 상호소통을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좋은 예가 된다. ‘역사적 사건’으로 과장되기도 하고, ‘하나의 정치적 쇼’로 폄하되기도 했던 사회통합 대표자회의의 직접적인 계기는 뤼틀리 실업학교의 폭력사태와 2005년 프랑스 소요사태로 드러났던 이민자 2, 3세의 사회통합문제였다. 이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사회적 안정과 국가안보를 이룰 수 없다는 위기감과 실제 이주민들의 사회통합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를 했지만, 정작 그것의 또 다른 주체인 이주민들과는 사회통합에 대해 논의 한 적이 없다는 자신 반성이 한 몫 했던 것이다. 어쨌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참여배제로 인해 전체인구의 5분에 1에 육박하는 이민배경을 가진 자들의 분노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귀 기우리려는 움직임이 최근 독일 주류사회 도처에서 포착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V. 나오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독일 이주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굳이 발제문의 제목으로 달면서까지 강조한 것이 무색해질 만큼, 사실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독일 이주사가 지금껏 단지 주류사회의 집단적 기억, 이해관계, 선입견, 이미지에 의해 기획된 역사였고, 독일 이민자들의 다양한 역사들을 담아내는 새로운 역사서술은 이제 시작단계에 있다는 사실이 그 어려움을 에둘러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민정책으로 그 대상을 좁힌다고 해도, 그 어려움은 여전하다. 왜냐하면 독일 이민정책에 대한 평가가 실제 어렵고,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두 제각기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사례는 오랫동안 한국의 외국인정책의 본보기가 되었다. 특히 한국정부는 양해각서를 통한 국가주도의 외국인모집과 내국인우선의 원칙을 골자로 하는 독일 단기 외국인력수급제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독일의 외국인정책 내지 이민정책을 맹목적으로 배워야 할 '성공한 정책'으로 보지는 않는 것이 분명하다. 독일은 '효율적인' 단기 외국인력제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외국인노동자의 정주화를 막지 못해 많은 사회적 문제에 직면했다는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정부는 사업장변경금지, 가족동반금지, 취업기간 최고 3년 설정, 그리고 불법체류자에 대한 지속적이고 강력한 단속, 처벌, 추방을 통해 단기 노동이민에서 장기체류 내지 장기이주로의 발전을 막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물론 국익이 전제가 된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국가적 통제와 관리는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를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성숙한 민주시민사회에서는 사실상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을 독일사례는 잘 말해준다.
독일이 외국인노동자의 단기순환원칙과 강제귀환을 포기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귀환을 권고하되, 그들이 머물고자 할 때는 그것을 허용할 수 있었던 이유로서 앞서도 강조했던 독일 사회의 인권의식과 사회적 책임은 짧지 않은 독일 외국인고용사로부터의 배움의 결과물이다. 130년 외국인고용의 역사는 국가권력이 민족주의와 국익의 이름으로 어떻게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과 일상을 유린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왕 인권의 문제가 나왔으니, 외국인노동자의 대한 유명한 막스 프리쉬의 문구를 인용해 보자. 솔직히 독일의 외국인정책을 이야기 할 때, 독일은 물론 한국에서도 너무 자주 인용된 터라 진부해 보이는 느낌이 없지 않으나, 독일 이주사로부터의 교훈을 찾기 위한 실마리를 주는 인용구로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노동력을 불렀다. 그런데 정작 온 것은 사람들이었다(Man hat Arbeitskräfte gerufen, und es kamen Menschen).”
독일보다 10년 앞서 외국인노동자들의 유입을 통한 사회문제를 경험했던 스위스의 막스 프리쉬의 비판의식은 전통적 이민국이 아닌 국가들에서 시행되었거나, 여전히 시행되고 있는 단기 인력수급정책의 문제점을 잘 꿰뚫어 보고 있다. 사실 오늘 필요하면 불렀다, 내일 필요 없으면 보낼 수 있는 인력을 원했던 독일사회는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강제로 내몰 수 없었다. 그렇게 내키지 않는 동거를 시작한 독일사회는 많은 제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대는 실패했고, 그것으로 인한 감정의 골은 무척이나 깊다. 독일에서 이민의 문제는 어느 듯 치유하기 어려운 감정의 문제로 발전했는데, 이민의 출발점이 사람들의 문제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노동력부족을 메우고 이윤극대화를 꾀하기 위해 혹은 구조개혁의 위기 속 기업의 생존을 위해 외국인력이 필요했던 기업주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통한 임금상승과 사회복지효과, 특히 삶의 질과 관계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외국인력의 도입을 용인했던 노동자들, 그리고 정권유지를 위해 경제성장을 지탱하는 노동시장정책의 일환으로 외국인력을 원했던 정치가들의 이해관계와 더 나은 임금, 더 나은 일자리, 가족들의 생계유지, 더 나은 자녀교육기회,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과 행복 등의 다양한 이유로 노동이민을 선택한 많은 외국인노동자들 내지 이민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 질 때 이민 내지 노동이민이 시작된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이민 내지 노동이민은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곧 이해관계들의 갈등과 충돌을 초래한다. 이미 국가적 통제와 관리의 한도를 넘어버린 실타래와 같이 얽혀있는 사람들과 사람들의 갈등과 충돌의 해결은 요원해진다.
결국 우리는 독일의 사례에서 한번 시작된 노동이민은 국가의 효율적인 통제와 관리를 불가능하게 만들 만큼 복잡한 이민문제를 야기하고, 이 문제의 치유를 위한 특효약은 사실상 없다는 겸허한 사실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손을 놓고 있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차피 이민문제가 사람들의 욕망들과 그것들의 충돌에서 시작된 불치의 만성병으로 진단이 났다면, 그것이 치명적인 병으로 발전하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간구해야 한다. 단지 요구되는 것은 사고의 전환으로, 사람들과 사람들의 갈등과 충돌로 시작된 문제이니, 그 출발점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는 일방적인 통제와 관리가 아니라, 주류사회의 토착민들과 이주민들의 소통을 위한 사회적, 문화적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이민문제는 양자 간의 소통과 대화, 그리고 그것을 기반 한 정책을 통해 순하게 길들여져야 할 것이다.
물론 이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된, 혹은 그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한 이주정책은 독일에 있어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솔직히 그러한 대화는 이제 시작되었고, 독일정부가 만든 이러한 소통창구에 대한 진위마저 아직은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것이 독일 인구의 5분1에 육박하는 이민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다양한 형태의 저항과 분노의 표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후 50년이 넘은 노동이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주류사회와 맞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할 수 있는 이민자공동체들은 독일에서도 흔한 예가 아니다.
그럼에도 독일의 예가 우리에게 부러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 이주노동자들과 이민자들 처한 현재의 상황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열악하다는 사실의 방증이리라. 귄터 발라프가 19세기에 대한 역사책에서나 서술됨 직한 상황이라고 혹평했던 1980년대 독일 외국인노동자들의 상황, 아니면 사진에 나오는 1970년대 우리 간호사들의 상황과 비교해도, 그 부러움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 동일한 노동을 할 경우, 독일인들과 대등한 임금을 받았고, 노조에 가입할 수 있었고, 많은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누렸고, 필요한 경우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독일사례가 남다르지 않은 것은 우리의 현대사적 경험 때문이다. 역지사지의 원리나 반인종주의 캠페인의 모토로 자주 사용되는 “누구나 외국인이다”라는 말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자신이 태어나거나 국적을 가지고 있는 나라를 떠나면, 누구나 외국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한다면, 외국인과 더불어 사는 다문화사회라는 것은 단지 이상 속에만 존재하는 헛구호만은 되지 않으리라. 그런데 정작 유학이나 해외이민의 경험을 통해 짧지 않은 외국생활을 통해 외국인으로서의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고 돌아 온 자들로 넘쳐 나는 사회임에도 정작 이곳의 외국인들과 외국인정책개선은 여전히 사회적 관심 밖에 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이곳의 외국인노동자들과 동일시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한때 외국인노동자였다”라는 말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줄 독일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것은 어떨까? 독일 현대사이자 한국 현대사의 일부이면서도 양쪽 모두에게 잊혀진 역사를 기억하는 것의 출발점은 어쩌면 이 땅에서 타자로서 살아가는 자들의 질고를 이해하고, 그들의 소리에 기울이며, 그들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닐지? 이 제안이 너무 이상적이고, 감정적으로 들린다면, 이민문제가 어차피 우리, 즉 토착민과 이주민의 감정을 관통하는 문제임을 상기시키리라. 굳이 이성적 측면, 즉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한다고 해도, 이민환경을 개선하여 고급 기술인력은 적극 유치하고, 미숙련인력은 필요한 경우 받아들이되, 정주화는 막는다는 선별이민의 원칙 -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발견되어지는 원칙 - 이 국익이 아니라, 어떠한 이유로든 이 땅에 머물고자 하는 이민배경을 가진 자들과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이후 있을 엄청난 비용의 사회통합비용과 사회적 불안과 소요라는 치명적 결과를 막는 진정한 의미의 국익임이 틀림없다.
(이 자료는 2007년 11월 6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개최한 협의회에서 발표한 자료임).



